며칠 전 인터넷 검색어에 걸려든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
마침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중이다.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를 이끌었던 괴팍하고 격정적인 사내.
밀레의 이삭줍기처럼 사물과 자연의 상태를
그대로 그린 미술 형식을 사실주의 자연주의라 칭한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처럼 사물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시간의 변화에 따른 찰나적인 인상을 표현한 인상주의.
고흐의 해바라기나 별이 빛나는 밤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 같은 후기인상주의,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우리가 잘 아는 작가들이다.
그런데 고흐와 고갱의 영향을 받은 블라맹크가 튀어 나온다.
캔버스에 물감을 직접 짜놓고 원색의 대담함을 쏟아내는 기법 자유로운 붓놀림과 단순화한 형태. 격정적인 터치.
주관적 감정표현, 뱀파이어라도 출몰 할듯한 강렬한 색의 대비. 밀림의 야수처럼 무섭고 거칠고 어두우며 강렬한 느낌 결코 편안하지 않다. 하지만 강한 울림이 있다.
그래서 야수파다.
뭔가 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다.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전혀 다르다.
특히 주관적인 감정표현이 맘에 와 닿는다.
블라맹크 전시를 본 다음날은 부암동 서울 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오치균 화백의 그림을 보았다.
어제 본 블라맹크의 느낌과 오버랩이 된다.
그는 대한민국 미술계의 블루칩다웠다.
사북 탄광촌의 풍경과 가옥. 시커먼 석탄가루가 켜켜이 쌓인 마을. 집과 풍경 기르는 개조차도 검은빛깔이 섞여있는 아름다운 폐허.
손으로 물감을 직접 만져서 그린 그림은 경계가 무너지는 듯 섞이는 듯 황홀경이다.
오치균은 표준색을 바르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했다.
메시지를 주지 않으려고 했고 주제와 인상을 주입하려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무엇을 왜 그리는가에 대한 질문은 없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현실 참여와 같은 문제의식은 없다
사북을 그렸지만 사북탄광촌의 시대적 아픔을 다루지는 않았다.
작가라고 모두 거창하게 시대정신을 투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진달래가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 바로 그렸을 뿐이다.
색들이 형태의 경계에서 부딪치고 포개지고 사그러 든다.
형태면을 넘나든다. 잠재된 색이 튀어나오고 잦아든다.
물감이라는 재료를 담금질하는 쇳물쟁이 처럼 자유자재로 주무른다.
그는 기법을 탐구하였다.
예술에서 작업의 과정과 기법은 매우 중요하다.
그 속에서 독창성과 창조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시대 사람이 아니지만 서로 교감한 사람들처럼 닮은 점이 있다.
그리고자하는 대상을 재현하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본능과 직관으로 그렸다.
재현하면 덤덤해지고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반면 표현을 하면 심미적 충격과 쾌감을 주게 된다.
블라맹크와 오치균은 나만의 표현을 하겠다고 작정한 작가들이다.
그들의 색들은 아우성을 치고 절규 한다.
피카소가 입체의 절규이고 뭉크가 선의 절규라면 블라맹크와 오치균은 색의 절규다.
두 작가는 자신만의 무기와 철학이 있다.
이들이 참 부럽다.
이오덕 선생은 자신의 책에서 글은 자신의 서사를 기록한 것 이어야 한다고 했다.
남의 글을 흉내 내지 말고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글이 살아있는 글이요 감동을 주는 글이라 하셨다.
하물며 예술에서야 말해 무엇 하리오.
그림은 철학의 한 갈래다.
철학은 왜 인가 라는 의심에서 출발하는 학문이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범주와 한계를 정하는 순간 거기서 막히고 멈추게 된다.
나만의 것이 필요하다.
아니 절실하다. 거기서 더 갈구하면 피어나지 않겠는가